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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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by Mind Map: 정약용

1. 다산 정약용을 흔히 성호학파의 좌파로 분류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직접 성호 이익(星湖 李瀷)을 사사한 것은 아니다. 그가 15세 때 다시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야 비로소 이익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이익이 사망한 상태였다. 이익의 가르침은 유고(遺稿)를 통한 것이었다. 고향 마재에서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 세 형 밑에서 기초 학문을 익힌 정약용은, 서울에 온 15세 때에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權哲身) 등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접하게 되었고, 성호의 제자들을 통해 사숙함으로써 성호학파의 막내로 입문하였던 것이다. 그의 가문이 재등용된 것은 정조가 즉위하면서였다. 그 후 그의 영달은 정조의 후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정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와 교유한 것은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문화 정치 상징 기관인 규장각에서 일하면서였다. 이때 맺은 북학파와의 교분은 그의 인생 후반기에 가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의 교제로 이어진다. 정조 조정에서 장기간 재상을 지낸 채제공과의 인연 또한 그의 경세 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의 서학 사상 수용에는 이벽(李檗)의 영향이 컸다. 이벽은 정약용 맏형수의 아우로서 사돈 간인데, 23세 때인 1784년 4월 집안 일로 그와 만나 서학의 상세한 안내를 받고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뒷날 그에게서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얻어 보고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을 한 것이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귀향한 이후에는 당색을 초월하여 학문적 교유를 했다. 환갑이 되던 1822년 봄 김매순(金邁淳)1)과 경의(經義)에 대한 문답을 하고, 6월에는 신작(申綽)2)과 『주례 周禮』의 육향지제(六鄕之制)를 논했다. 72세 때인 1833년에는 홍석주(洪奭周)3)가 연경에서 가져온 완원(阮元)의 『십삼경교감기 十三經校勘記』를 빌려 읽었고, 『상서』에 대해 토론했다. 홍석주와 김매순은 연대문학(淵臺文學)으로 당대에 날리던 학자들인데, 이 노론계 학자들과의 토론은 정약용의 학문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 정약용의 면모는 경학 연구와 경세론(經世論)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상서』를 핵으로 하는 경학 연구는 성리학자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살다 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조선이 중세 농경 사회에서 근대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이므로, 중세 농경 사회에서는 합리적 사상이었던 성리학이 더 이상의 시대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였다. 이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근기남인 학파는 원시유학인 육경학의 연구로 선회했지만, 시대는 그보다 좀더 전진된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정약용은 실학으로 제기된 북학 사상에 주목하고, 과학 기술에 관심을 집중, 전환함으로써 북학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그의 경세론 부분은 이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다. 기중기(왼쪽)와 거중기(오른쪽) 정약용은 선교사 J. 테렌츠가 중국에 소개한 기중기를 참고하여 거중기를 제작, 수원성 축조에 활용하였다. 정약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종래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지구는 둥글고 자전하며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기술을 천시하던 종래의 유교적 통념을 비판했고,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기술의 발전을 확신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인륜을 가졌다는 점 외에 기술을 소유한다는 점과,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술 문명에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부국 강병 및 이용후생과 직결되는 농업 기술, 방직 기술, 군기 제조 기술, 의료 기술의 혁신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이용감(利用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북학으로 오로지 직책을 삼을 것(專以北學爲職)’ 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약용의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입각했다. 문학 작품은 ‘도(道)’ 라는 철학 내지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적 축적에서 발원하는 것이지 손끝의 잔재주나 기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의 퇴폐적인 문풍(文風)을 비판하고 순정(醇正)한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동조한 데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스스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시는 긴요한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하는 데 무익한 것은 아니다.”하여 시의 공용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설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3,000수에 가까운 시와 부(賦)를 비롯하여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2. 업적

3. 생애

3.1. 벼슬길에 오르다

3.2. 유배를 가다

3.3. 낙향하다

4. 사건